김교성 작곡가
(1904-1961)
<울고넘는 박달재>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 노래 박재홍
일제강점기 가요와 노래를 이야기하면서 김교성을 빠뜨릴 수 없다. 김교성은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1년 숨을 거둔다.
김교성은 광산업을 하던 부모로부터 한성부(지금의 서울)에서 1904년에 태어났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 내력으로 성당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합창단과 성극을 접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동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독학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배워 연주한다. 클라리넷 연주 실력이 좋았던 탓에 일찍부터 영화관 악사로 들어가 활동한다. 당시 무성 영화 시대였기 때문에 음악을 만드는 악기팀이 있는 곳이 많았다. 악기 뿐 아니라 편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김교성은 다양한 음악을 만졌다.
1930년 즈음에 김교성을 가수였던 나품심과 결혼하지만 그의 방랑기 때문에 이혼한다. 당시 이혼은 정말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그는 결국 가요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신민요풍의 곡에 소질이 있었는지 잘 편집했다. 1936년 선우일선이 부른 <능수버들>로 유명세를 탄다. 하지만 그는 1932에도 이미 빅타레코드를 발표된 강석연이 부른 <영객> <서울행진곡> 등을 발표했다. 이후 이애리수의 <처녀 행진곡>과 강흥식의 <삼수갑사> 등을 발표하면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드러낸다.
1940년대 전후로 발표한 곡들 중에 유명한 곡들이 많다. <사막의 애상곡><직녀성> <꽃다운 청춘> <찔레꽃> 등이다. 해방 후 ‘콩쿠르 대왕’의 별명이 붙을 만큼 갖은 콩쿠르에 김교성은 빠지지 않았다. 아이돌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 봐도 무방하다. 작곡가 보다는 ‘심사위원 김교성’이 더 유명해졌다. 그 이후로도 <자명고 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 <고향역> 등을 작사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비참했다기 보다는 그런 삶을 원했다. 그는 한곳에 머무는 것이 싫었고, 누군가에게 붙들려 사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의 결혼 실패와 이혼은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에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자기 집도 없이 떠돌았던 김교성은 1961년 2월 2일,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덕수궁 앞 길거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주현미가 부르는 <울고 넘는 박달재>
황금심이 부르는 <능수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