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송
김해송(1915년 4월 5일 ~ 1950년 2월 5일)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작곡가입니다. 그는 여러 히트곡을 남기며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는 특히 재즈를 접목한 대중음악으로 당대의 음악적 흐름을 선도했습니다. 김해송은 가수 이난영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두 사람은 당시 최고의 가수와 작곡가로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습니다.
[일생]
초기 생애
김해송은 191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김송규(金松奎)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으며,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김해송은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접하며 다양한 음악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후에 그의 음악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음악 경력
김해송은 1930년대 중반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쌓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습니다. 1938년, 김해송은 오케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에만 32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거나 불렀으며, 이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의 초기 히트곡 중 하나인 "연락선은 떠난다"는 부산 항구에서 이별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노래는 박영호가 작사하고 김해송이 작곡했으며,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전쟁과 말년 김해송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재즈, 블루스, 스윙 등 서양 대중음악에도 능통했습니다. 그는 만요(漫謠)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며 "개고기 주사", "모던기생점고", "전화일기"와 같은 곡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곡들은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하며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해송의 재능은 무대 연출 분야에서도 빛났으며, 그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곡 작품으로는 "오빠는 풍각쟁이", "화류춘몽", "울어라 문풍지" 등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가수 이난영과 결혼하여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해송은 해방 후에도 활발히 활동하며 KPK악극단을 결성해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고, 그 후로는 그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김해송은 납북되었고, 그 후로는 그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1950년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요 히트곡
1. "삼팔선의 봄"
- 발표연도: 1948년
- 설명: 이 곡은 한국의 분단 상황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김해송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삼팔선을 넘나드는 이별과 만남을 주제로 한 가사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특징입니다.
2. "청춘의 꿈"
- 발표연도: 1940년대
- 설명: 젊은이들의 희망과 꿈을 노래한 곡으로, 경쾌한 리듬과 밝은 멜로디가 특징입니다. 이 곡은 당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3. "유랑극단"
- 발표연도: 1940년대
- 설명: 유랑극단의 삶을 노래한 곡으로, 박향림이 불러 유명해졌습니다. 김해송의 작곡 실력이 잘 드러나는 곡입니다.
4. "항구의 청춘"
- 발표연도: 1940년대
- 설명: 항구에서의 청춘의 삶을 노래한 곡으로, 바다와 청춘의 자유로움을 잘 표현한 곡입니다.
5. "꿈꾸는 백마강"
- 발표연도: 1940년대
- 설명: 백마강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꿈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곡입니다.
1938년 김해송의 청준계급
[가사]
노래를 부르자 사랑의 소레타
이 밤이 다 새도록 노래를 부르자
아~ 어여쁜 나폴로
아~ 라리리리 라리리리 라랄라
워카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자
춤이나 추잔다 사랑의 텝댄스
이 밤이 다 새도록 춤이나 추잔다
아~ 귀여운 와팟슈
아~ 라리리리 라리리리 라랄라
샴팡을 마시며 춤이나 추잔다
춤추고 노래해 여기는 팔레스
우리는 에로이카 그늘의 용사다
아~ 상냥한 악마여
아~ 라리리리 라리리리 라랄라
살뜰히 마시며 춤추고 노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