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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백난아

by Ἀμφίων 202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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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아(1925-1992)


백난아는 대한민국 가수이다. 본명은 오금숙이다. 제주시 망월리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백난아


백난아는 1925년 제주시 한림읍에서 출생한다.(어떤 곳은 1927년) 제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백난아는 3살이 되던 해인 1930년에 가족과 함께 고향 제주를 떠나 만주로 이주한다. 그러다 다시 9살 때 함경북도 청진에 정착한다. 청진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1940년 보통학교 6학년 때 콩쿠르에서 우승한다. 양재여숙을 졸업하고 15세 때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주최환 콩쿠르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한다. 그해 유명한 가수였던 백년설에게 백난아라는 예명을 받고 '오동동' 극단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한다.

데뷔곡으로 발표한 '오동동 극단'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계속하여 곡을 발표한다. <땅버들 물버들> <아리랑 낭랑> <찔레꽃> 등을 발표하면서 백난아의 인기를 더욱 높아간다. 

광복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더욱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TV가 보편화되지 않아서 가수가 된다는 말은 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1949년 <금박댕기> <낭랑 18세> 등을 발표하면서 또한 인기는 치솟았다. 하지만 이듬해 625가 일어나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된다.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군예대로 활동한다. 1992년 1월 21일 대장암과 고혈압이 겹쳐 숨을 거둔다.

1942년에 발표한 <찔레꽃>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망향가이다. 

 

[대사: 대사 부분은 해방 이후에 넣은 것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 날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슬픈 별 아래 서야 했다. 절망의 황혼, 우리는 허수아비였다. 슬픈 앵무새였다. 광란의 전쟁 앞에 바쳐진 슬픈 제물이었다. 정거장마다 목이 메어 미친 듯이 남의 군가를 부르며 남의 전쟁터로 끌러 가던 젊은이들의 충혈한 눈동자가 그 절망의 황혼을 보고 있었다.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벳끼는(벗기는) 근로 보급대의 하룻날 어린 소년들을 점심을 굶었고, 고갯마루를 오르는 목탄차는 일제의 마지막 숨결이냥 허덕였지. 까까머리에 국민복 을씨년스런 몸뻬 차림으로 한 톨의 배급 쌀을 타려고 왠종일 이른바 나라비를 서고,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 갈까 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 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산천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우린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는데]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잇을 사람아....


백난아 기념비는 제주시 한림읍 명월이에 세워져 있다.

 

백난아가 부르는 <낭랑 18세>

 

황금심의 발표곡


일제 강점기 시절

오동동 극단
갈매기 쌍상
망향초 사랑
땅버들 물버들
도라지 낭랑
아리랑 낭랑
찔레꽃
흥아의 봄

해방 후

금박 댕기 / 렉키레코드
낭랑 18세 / 렉키레코드
인도야곡 / 렉키레코드
멕시코 나이트 / 렉키레코드
고랑포 아낙네 / 고려레코드

등이 있다. 더 많은 곡은 <백난아의 발표곡>에서 확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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