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애가
작사 정성수
작곡 김부해
노래 지화자
발표 1961년
산동애가 배경
산동애가는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산동은 전남 구례에 위지한 지라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산동은 원래 중국 지명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그곳에 조선 사람들이 피난을 많이 갔다. 그곳의 처자가 구례로 시집을 오면서 집 앞에서 있던 산수유 나무 하나를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자신의 있던 곳을 기억하려 그곳 이름을 산동이라 지었다.
산동애가는 바로 이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산동의 상위 마을은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도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육이오)를 겪으면서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다.
여순사건 때 산동의 백부전이라는 19살 처녀가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이 지역근방은 좌익으로 불리는이들의 근거지였다. 여수에서 반기를 든 좌익들반란을 일으킨 것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좌익을 개보다 못한 인간 쓰레기 취급을 하던 이승만은 그곳을 '토벌'하도록 명을 내린다. 사실 제주 4.3 사건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사람에의해 주도된 것이다.
백순례의 조카가 증언한 것이다.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와 고모(백순례-노래의 주인공)가 군인에게 함께 끌려갈 처지였다고 한다. 당시 끌려가면 군인들은 한 곳에 모아놓고 아무런 증거도 말도 없이 곧바로 총살 시켰다. 인터넷에서 '여순반란사건'이란 단어만 검색해도 수많은 자료들이 나온다. 백순례는 제말 자신이 갈테이 오빠만은 살려 달라고 했단다. 대를 이어야 한다면. 지금 생각하면 참우스운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는 대는 잇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했다. 그렇게 백순례는 산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수 백발의 총성이 올렸다.백순례가 끌려가며 지었다는 노래가 바로 산동애가이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산수유따는 때가 되면 산동애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까마귀 우는 곳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다린 머리 쓸어안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산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졌네
(대사)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은데
산수유 열매 따서 부모 효성 다 못하고
열아홉 살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을 나는야 간다
꽃이 지면 다시 피고 세월 가면
봄은 오건만 이내 몸 인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 거나
노고산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아! 너만은 영원히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로
회오리 찬바람에 엄마 아빠 묶여가는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화엄사 종소리에 영원토록 울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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