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나리아
신카나리아는 본명이 신경녀이며 일제강점기에 데뷔하여 활동한 대한민국 가수이다. 2006년 11월 24일 별세했다.
신카나리아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1912년 10월 26일 태어났다. 원산 루씨고등여학교를 중퇴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닌 덕에 성악가였던 이인범의 누나인였던 이옥현에게 노래를 배운다. 신경녀가 16세가 되던 해, 임서방이 이끄는 조선예술좌가 원산 순회 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한다. 후에 신카나리아는 임서방과 결혼한다.
임서방이 이끄는 조선예술좌가 원산 지역에 순회 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후에 신카나리아는 임서방과 결혼했다. 이동극단 막간 가수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 뒤 1928년에는 〈뻐꾹새〉와 〈연락선〉을 취입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한국 최초로 예명(예능인이 본명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을 사용한 가수가 되었다. 조선예술좌에 가입할 때 목소리가 귀엽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서방은 신카나리아를 유난히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신입이었지만 임서방의 배려로 신무다에 입단하면서 곧바로 막간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그의 첫곡은 세에론레코드 제1회 신보에서 <사랑아 곡절 없어라>였다.
곱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와 같다는 평을 들었고, 막간 무대에서 부른 〈강남달〉과 〈강남제비〉을 비롯하여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베니스 노래〉, 〈에헤라 좋구나〉, 〈애수의 부르스〉, 〈노들강변〉, 〈그 님은 떠나고〉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원제가 〈무궁화 강산〉인 전수린 작곡의 〈에헤라 좋구나〉는 신카나리아 자신이 즐겨 부른 애창곡이었다.
1935년 태평레코드 5월 신보에서 시극 <정한의 밤차>가 발매되어 많은 사랑을 받앗다.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 하략
1938년 이후로는 음반 활동보다 악극단 공연에 좀 더 집중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김해송의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첫 남편인 임서방과 이혼하고 시나리오 작가인 이익과 재혼하여 함께 새별악극단을 창립하고 순회 공연을 벌였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가던 중 폭격을 틈타 탈출해 나온 일화가 있다. 탈출 후에는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위문 공연에 참여했다. 1960년대에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카나리아 다방을 운영하면서 동료 가수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활발한 방송생활을 했고 특히 KBS 가요무대에 원로가수 접대를 받으며 출연하였다. 2002년 추석특집 가요무대에 출연한 후 사실상 은퇴 하였으며, 고령으로 인한 노환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다 2006년 11월 24일 만 94세에 노환으로 고인이 되었다. 고인의 사위 이종광 씨는 “장모님께서는 3년 전부터 중풍으로 인해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다”라고 털어놓았다.
장례식은 11월 26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에 위치한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
대표곡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뻐국새
에헤라 좋구나
애수의 부르스
노들강변
그 님은 떠나고
1963년 신카나리아의 '강남제비'
가요무대에서 노래하는 신카나리아 <노들강변>
[참고 자료]
박찬호/안동일 <한국가요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