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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노래

한국 대중 가요의 역사

by Ἀμφίων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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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 가요의 역사

 

이 글은 한국 대중 가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의하고 당대의 유명한 가수와 히트곡을 정리하는 수준입니다. 온 시대를 살아갈 수 없고, 살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글의 내용은 필자의 경험과 편견, 왜곡 등이 다수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대중 가요를 한눈에 들어도록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단순한 작업입니다. 글은 다양한 인터넷 자료와 기사, 책들을 참고하여 정리 됩니다. 가능한 출처를 밝히지만 스킨의 한계상 모든 글에 각주나 주를 달 수 없음을 알려 듭니다. 하단에는 중요한 자료와 논문, 책들을 정리하고 인용한 신문이나 인터뷰 내용들은 글 안에 각주 또는 링크를 통해 정리합니다. 책으로 말하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단번에 정리할 수 없기에 글은 필요와 자료가 모아지는 대로 계속하여 업데이트 됩니다. 글은 평서체와 하대어를 사용합니다.

 

이 글의 범위와 내용

 

이 글은 한국 대중 음악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한국 대중가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 있지만 여기서는 번역이든 번안이든 상관 없이 한국 사람이 부르고, 향유하고, 공유했던 대중들의 음악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의 찬미의 경우도 왈츠인 <다브뉴 강의 잔물결>의 멜로리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일반 대중 가요로 부른다는 말입니다. 필자는 음악 전문가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전문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므로 용서 사용에 있어 실수나 오류가 많음을 알려드리며, 일반인의 관점에서 저술된 것임을 밝혀 드립니다.

 

한국 대중 가요의 시작 : 일제 강점기 이전과 직후

한국 대중 음악은 조선말부터 보는 것이 합당하다. 논란의 여지는 많으나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는 조선의 음악과 서양의 음음이 혼용된 시기이다. 대중이란 용어로 인해 유성기를 대중이 발화점으로 보지만 필자가 보기엔 과도해 보인다. 판소리도 대중을 향한 것이 아닌가.

 

신민요 아리랑

 

조선의 창법을 벗지 못한 상태였지만 서서히 대중 음악이 유입되면서 조선후기에도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장유정은  나운영의 "아리랑"을 그 예로 제시 한다. 아직도 아리랑은 그 기원이 무엇인지 논란이 많다. 하지만 대중적인 형식을 띤 아리랑은 조선 말기인 것은 확실하다.  아래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리랑을 나운규 한 사람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왜곡된 일이다. 전국에 전혀 다른 아리랑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신민요로 구분한다. 이후 채동원과 강석연의 "아리랑"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어 간다.

 

교회의 찬송가

 

대중 역사에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지만 한국 대중 가요의 저변에는 한국 교회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가 많은 부분에서 문화를 이끌었고 주도했다. 특히 일제강점기까지 교회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교회는 서양 문물과 음악이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한상우의 <한국야악인물사1-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지식산업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서양음악을 일반 사람들이 접하게 된 것은 일반 교인들이 함께 노래하는 예배 형식을 갖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 결국 이들 선교사들이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은 이 나라에 서양음악을 보급하는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서울의 이화옂너과 연희전문, 그리고 평양의 숭실전문 등이 전문적인 음악과가 없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의 음악활동으로 이 땅에서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을 배출해낸ㄴ 데 크게 공헌했다. ... 자연히 교회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12)

 

그러니까 서양적인 음악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다녔고, 교회를 통해 유학을 갔고, 그로 인해 한국 내에 양악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군악대를 지휘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 비록 3회밖에 배출을 못했지만 "조선정악전습소"는 안타깝게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기에 일제에 강하게 저항하며 계속하여 한국 대중문화의 저변을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반일을 외치던 기독교가 1940년대 이후 급친일로 돌아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치명적인 퇴보이다. 대중가요로서의 찬송가는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일반 대중가요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자.

 

신유행창가

 

한국 초기 대중 가요를 논하면서 이상준과 '창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준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2세 때 상경하여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고, 신문로 교회 찬양대를 지휘한다. 안창호를 만나 1902년부터 여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에 들어가 하규일로부터 남창을 지도받아 한국 가곡을 전공한다. 김인식에게 서양음악 이론을 배워 당시 유행했던 다양한 음악들을 채보하는 데 일조한다. 그는 <신유행창가>를 지어 조선인들을 계몽하는 데 사용한다. 신유행 창가에는 '청년 경계가' '엿장사' '나팔절' '낙화유수' '사고국가' '사랑가' '사의 찬미' 등이 있다. 신유행창가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면 될 것 같다.

음악 장르를 불문하고 192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내용 또한 다양하고 다채롭다. 음악적인 내용 면에서 교육 창가를 비롯하여, 계몽창가, 찬송가, 동요, 유행가, 세계명곡, 일본 대중가요, 신민요 등 다양하며, 가사의 내용 면에 있어서도 교육적인 내용과 종교적인 내용에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담은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그런 가운데 이별과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행창가(流行唱歌))]

 

신유행창가는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으나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초반에 유행했던 일반대중들의 음악아라고 하면 어느 정도 정의가 될 수 있다. 이때의 음악은 서양음과, 조선음악, 일본음악 등의 영향을 고르게 받아 다양한 형태의 음악으로 발전하고 응용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성기 대중을 홀리다

 

기존의 대중음악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다면 유성기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일한 노래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된다. 초기의 유성기는 비싸기도 하지만 공간의 제약도 있었다 하지만 가수가 직접 사람들을 모아 부르는 기존의 방식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또한 한 번 녹음하면 무한반복이 가능했다. 동일한 음악을 다른 레코드에 복사할 수 있었기에 확장성은 무한했다.

 

음반으로 알려진 최초의 창작가요는 <낙화유수>이다. 당시 변사로 활동했던 김영환(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곡이다. 노래는 동요 가수로 알려진 이정숙이 했다. 1929년 발매 된다. <낙화유수>는 발매보다 2년 빠른 1927년 영화 <낙화유수>의 삽입곡으로 들어간 노래이다. 이후 인기를 얻어 음박으로 발매된 것이다.

 

낙화유수 이정숙

 

<낙화유수>는 서양식 음악을 따르면서도 우리나라 전통 박자인 3박자이기에 당대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친숙한 노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장르가 혼합된 형태를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이른다.

 

한국 대중 가요의 시작 : 일제 강점기 중반

 

일제강점기 중반을 연도로 표시하기는 상당히 모호하다. 대체로 1930년대 전후부터 40년대 초반까지로 본다. 후반은 2차대전 말기로 접어 들면서 대중가요는 일제의 업압과 탄압으로 거의 말살 위기에 접어든다. 장유정이 구분한 대중 가요 역사를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의 구분은 이렇다.

  • 태동기 / 1907-1929년
  • 형성기 / 1930-1940년
  • 암흑기 / 1941-1944년

필자는 장유정의 구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유성기 이후부터 1940년까지를 중반으로 잡고 일제강점기 시절의 '흥왕기'로 구분하고 싶다. 이유는 간단한다. 당시는 대중 음악이라고 말하기는 모호한 부분이 상당히 존재한다. 단적으로 아직까지 '우리의 음악'이라고 말하기 힘든 혼재된 음악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의 압제 속에서 강요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40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름 대중 음악이 활발하게 불려 졌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 때의 특징은 유성기와 더불어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하며서 이전과 다른 유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송출은 1927년 2월 16일이며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라디오는 일본인들과 조선 부유층의 전유물이기는 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가진 사람의 집에 모여 함께 들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변화는 기존의 전파 방식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소위 이제는 단곡이나 연극의 중간 음악이 아니라 앨범으로 만들어져 들려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앨범은 1907년 3월에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가 일본 오사카에서 취입한 것이다. 일본에서 취입하고 미국으로 가서 음반을 만들어 다시 들여왔다. 1908년에는 서울에 취입하고 미국으로 가서 앨범을 만들었다. 그러다 1909년 5월부터 일본에서도 음반을 생산할 수 있게 되고, 1911년 9월에는 ‘일본축음기상회’가 조선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음반의 시대가 열린다.

 

1925년부터 서울에서 쉽게 취입이 가능하도록 간이 녹음실이 만들어 지면서 취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음반은 일본으로 가서 만들어져 발매 되었다. 우리나라 음악이 일본에 예속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참조 : 문화재청 한국의 옛 음반, 유성기 음반 이야기]

 

일본음악이 들어오다

합일합방 이후 수많은 일본 사람들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에게 조선은 새로운 개척의 공간이요 기회의 장소였다. 조선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 또는 헐값에 사들여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서양의 기술과 음악을 절적히 들여와 사용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음악이 존재할까 싶기도 할 정도로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근대화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들어온 음악으로는 <카츄사의 노래> <장한몽가> <자가메라> <시들은 방초> <이 풍진 세월>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이 풍진 세상>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게 개사 되어 불려졌다. 당시 노래 제목은 앞 가사로 정해진 탓이 수많은 제목으로 바뀌어 불려진다. 후에는 '희망가'라는 이름으로 거의 통합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다양했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채규엽의 희망가 / 노래 명국환

 

교회에서 개사되어 불려진 희망가, 교회에서는 <우리 서로 사랑하자>이다. 

 

(1)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2)하나님은 곧 사랑이요 주 예수님도 사랑이라
성령 받은 자 큰 증거는 온전한 사랑이라
 
(3)사랑은 항상 오래 참고 또한 참으로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아니하네
 
(4)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또한 무례히 행동 않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아니하네
 
(5)사랑은 남의 악한 것을 기억하지도 아니하며
불의한 것을 기뻐 않고 진리로 기뻐하네
 
(6)사랑은 무슨 일에 참고 또한 범사에 믿으며
범사에 항상 바라면서 범사에 견디도다
 
(후렴)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찬양으로 개사한 희망가

 

 

한국 대중 음악의 시작을 알리다.

1920년대는 여러 음악이 다양하게 혼합되고 믹스되어 혼란의 시기였다면 1930년대부터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띄게 되고,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는 가수들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이난영을 비롯하여 채규업, 이화중선, 이애리수, 전옥, 왕수복, 남인수, 김정구 등의 가수들이 이름을 알린다.

 

당시 노래를 딱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으나 대중 음악의 관점으로 보면 '트로트'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는 트로트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유행가'로 사용했다. 후대에 이것은 따로 트로트로 분류 하였기에 '트로트'로 사용한다. 아직도 트로트라는 음악갈래의 기원와 용어는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최초의 트로트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사람들은 형식을 일본음악을, 가사와 내용은 일본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가사에 나오는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는 시간을 거슬러 1592년 임진왜란의 것이었다. 순사에게 붙들려간 이난영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마음으로 통쾌했을 것이다. 장유정은 트로트를 이렇게 평한다.

 

"요컨대 트로트가 음악적으로는 당대 유행하던 일본의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나, 그 가사는 당대인의 삶을 핍진하게 드러내어 당대인의 호응을 받았다. 트로트는 외래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갈래라 할 수 있다." (117)

 

 

 

더 많은 일제강점기 가수와 가요는 아래의 글을 참조 바람.

 

한국 대중 가요의 시작 : 일제 강점기 후반

1930년대는 비록 일제강점기의 어둔 시대이긴 하지만 대중 음악사로서는 다양한 음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음반과 라디오를 통해 대중화가 진행된 흥왕기다. 하지만 40년 이후 2차대전 말기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국운은 점점 기울어 갔고, 미국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에게 패하기 시작한 일본은 조선과 중국 점령지, 동남아 식민지에서 군인들을 강제로 징용하기 시작했고, 무기를 만들기 위해 돈을 거두기 시작한다. 친일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이다.

 

음반 검열이 시작되다.

일제말기로 가면 점점 일본의 문화 통치가 강화되면서 검열이 강화된다. 정식적으로 시작되는 해는 1933년 5월이다. 이 때일제는 조선통독부령 제47호를 발동하여 본격적으로 음반을 검열한다. 그들은 치안 방해와 풍기 문란이란 이유를 댔지만 조선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목적이었다.

 

해방과 40년대의 대중 가요

 

 

1950년대의 대중 음악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시음악

전후음악의 변화 미8군쇼

 

1960년대의 대중 음악

 

1970년대의 대중 음악

다양한 음악의 혼재와 발전

나훈아와 남진의 대결 구도

이미자 패티김 다른 결의 경쟁

 

1980년대의 대중 음악

전두환의 쿠데타 성공과 신군부의 등장

조용필의 대중음악의 아이콘이 되다.

 

1990년대의 대중 음악

민주화, 아이돌가수의 등장과 서태지

걸그룹의 폭발적인 발전과 모순들

IMF와 음악의 변화

 

뉴밀레니엄 시대의 대중 음악

한류의 시작

한국음악 세계로 향하다.

 

2016년 이후의 대중 음악

한국 음악이 K-pop으로 진화하다.

BTS와 블랙핑크 세계음악을 주도하다.

 

블랙핑크

 

[참고 문헌]

 

  • 한상우 /한국양악인물사 1.2 -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 / 지식산업사
  • 박찬호 (이준희 편집) / 한국 가요사 1. 2. / 미지북스
  • 장유정. 서병기 / 한국 대중 음악사 개론 / 성안당
  • 유차영 / 유행가가 품은 역사 / 농민신문사 

 

 

논문

이준희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

이영미 [내가 체험한 1980, 90년대 음반 검열과 음반법], 성공회대

 
 

인터넷

 

아래는 벅스에서 만든 한국음악 역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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