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권 생애와 히트곡
개요
이인권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활동한 대한민국 가수이다. 작사와 작곡을 겸했으면 독학으로 기타 연주를 배워 활동했다. 본명은 임영일(林榮一)이다.
생애
이인권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영일(林榮一)이다. 1930년경 오케레코드가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하게 된다. 청진에서 자리를 펴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철과 박시춘에 의해 임시 가수로 발탁을 받는다. 청진에 공연단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가 되고 싶어 오케레코드그랜드쇼단을 찾아가 가수로 채용해 달라고 한다. 이철과 박시춘을 노래를 들어보고 결정한다면 그에게 노래를 청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들은 이인권을 오케레코드쇼단의 막간 가수로 활용하기로 한다.
당시 남인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남인수의 노래를 불러준 사람을 찾자 이인권을 알게 되어 대리가수로 세운 것이다. 당시는 영상이 아니었기에 목소리가비슷하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철은 그를 '청진의 남인수'로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뜅난 가창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그후로 줄곧 남인수를 대신하는 대역을 맡아 순회공연을 다닌다. 당시 공연은 현재의 오페라와 비슷하여 연극과 노래가 섞여 있으며, 막이 내리고 다시 올가갈 중간에 막간 가수를 내보내 노래하게 한다.
1938년 <눈물의 춘청>으로 데뷔하고, 1940년에는 드디어 그 유명한 <꿈꾸는 백마강>을 발표한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와 절절한 사연을 담은 백마강의 사연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고백수와 남인수, 백년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록 유명세를 탔다.
이후 해방이 되고 계속하여 가수로 활동한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육이로전쟁으로 알려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대구로 피난하여 계산동의 성당 부근에서 셋방살이를 한다. 당시 결혼을 한 뒤라 가수였던 아내와 더불어 위문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어느 날 공연을 하던 막사에 목탄에 터져 아내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자신은 다리에 부상을 입는다. 이때 아내를 잃은 슬픈 심정을 담아 태고풍의 자작곡인 <미사의 노래>를 만든다. 가슴 아픈 사연을 알게된 사람들을 <미사의 노래>를 사랑해 주었다.
이후 그는 계속하여 독학으로 기타와 색소폰을 배우고 작곡법까지 배운다. 그후로는 자신이 직접 부르지 않고 다른 가수들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주었다. 송민돈의 <카츄사의 노래> <최무룡의 <외나무 다리> 현인의 <꿈이여 다시 한번>,>,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등이 이인권의 곡들이다.
1973년 53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에 걸리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