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가수와 가요
일제강점기 시절의 가수와 대표곡을 정리한 곡입니다. 가능한 많은 곡을 실을 예정이지만 모든 곡을 실을 수 없기에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던곡 중심으로 실었습니다.
1. 일제강점기 시기 구분
일제 강점기의 노래를 시대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 인터넷을 주로 참조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앞은 가수 이름이거나 예명이고 뒤는 노래제목입니다. 발매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 )안에 발매 연대를 숫자로 표기했습니다.
1기는 1880-1915년까지이며, 엄밀하게 그렇다할 가요는 없는 시대이다. 대중음악사로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한 시기이다.
2기는 1916년부터 1932년까지로 근대적 성향의 새로운 음악이 출현하고 음반이 발매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문화 통치기로 불리는 이 때는 가장 음악이 융성할 때이다.
3기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로 폭발적인 확장과 정체, 그리고 해방까지의 과정이다. 일제는 말기로 접어들면서 문화정책을 강화하고 친일을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1기 1880-1915년 (무단 통치기)
자작곡은 거의 없는 시기다. 노래풍도 향토적이며 아직 근대적 이미지는 갖지 못했다.
2기 1916년부터 1932년 (문화 통치기)
조선의 창의 영향을 받은 신민요와 일본의 엔카의 영항을 받은 트로트(도롯도)를 비롯하여, 서구의 음악들이 들어와 다양한 형태를 갖게 되는 시기이다. 30년대로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3기 1933년부터 1945년 (민족 말살 통치기)
30년대 이후 대중이란 의미도, 대중 가요의 의미도 확립이 된다. 장유정은 1930-1940년까지를 '대중 가요의 형성기'로 본다.(92) 일제강점기 시절만본다면 30년대는 확실히 대중가요의 황금기다. 그래서 이 시기의 노래들을 보면 확실히 밝고 경쾌하다. 독립하려는 의지도 거의 사라진다.
[일제 강점기 가수와 노래 목록을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글을 참조하십니다. 년도별로 발표된 노래와 가수의 목록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가수와 노래와 약간의 해설
1기 1880-1915년
이 시기는 혼란의 시기며 음악적으로 황량한 시대다. 아직까지 대중가요의 개념이 만들어지지않았고, 백성들을 선도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외국곡의 멜로디를 가져와 가사만 바꾼 곡들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혼란의 시기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노래를 통해 발설했다. 이 시기는 혁명적 노래가 많다.
1894년 새야새야파랑새야 대한제국민
구한말 비리와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전봉준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1910년 송 안중근 선생 / 대한제국국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일본은 조선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즉각적이고 강제적으로 이완용등을 통해 친일내각을 강화시키고, 순종에게 한일합방에 조인하게 한다. 이때가 1910년 8월 22일이다. 공식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통치한다는 내용의 칙서이다. 이제는 통감부가 아닌 총독부를 설치하고 입법. 행정, 사법, 군수권을 이양받고 총독으로 데라우치 통감을 세운다. 이때 즈음에 생겨난 노래가 <거국가>이다. 안창호가 작사고, 이상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안창호. 이상준 <거국가> 1910?
1절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일로 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나 간다고 설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2 절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건널 때도 있을지요 시베리아 만주 들로다닐 때도 있을지나 나의 몸은 부평같이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3절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빈주먹을 들고 가나 이후 성공(상봉)할 때에는기를 들고 올 터이니 눈물 흘린 이 이별이기쁜 일이(환영)되리로다 악풍 폭우 심한 이때부대부대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나의 사랑 한반도야
1910년 충정가 / 독립광복군 찬군국군
1910년과 1919년 사이의 10년은 일제의 통치각 극에 달했다. 초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토지신고제를 도입하여 신고를 하지 않는 토지를 몰수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몰라서 일부러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일제가 몰수한 땅은 전국토의 40%에 달했다. 이 땅들은 조선으로 거주해 오는 일본인들과 동양척식회사 등과 같은 일본 기업들에 헐값으로 팔아 넘겼다. 그로인해 조신들을 땅을 잃고, 주권을 잃고 한반도는 떠나 만주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복수의 <타살살이>는 당시의 시대적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였다. 이 부분은고복수의 <타향살이>, 고복수의 생애와 히트곡을 참조 바람.
2기 1916년부터 1932년
일제가 완전히 대한제국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통치 권력 아래 둘 때다. 초기는 강압 통치가 이루어지고 이후 일본 문화와 조선의 문화를 병합하는 문화통치가 이루어진다. 30년이 넘어가면서 일본은 조선 말살정책을 펴 가게 된다.
망국가 1910이후?
- (1919년이 직전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1. 철사주사 결박한 줄은
우리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뢰 소리에
바다이 귾고 산이 동켔네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수묘전토도 내 것 못 되네
무리한 수욕도 대답 못하고
공연한 구타도 그저 받누나
3. 한 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 전 한 번은 꿈틀거리고
조그만 벌도 누가다치면
그 몸을 반드시 쏘고 죽는다
1919년 광복가 / 대한제국 국민
1919년 3월 1일은 삼일절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 해가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종황제가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고종이 1919년 1월에 승하한다. 이 때 사람들은 일제나 민비 일파에 의해 독살되었으리라 의심했다. 당시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게나'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지만 민씨를 대한제국의 황후이 어쩌니 하지만 당시 역사 문건들을 보면 민씨 가족이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증거들이 수두룩 하다. 말을 말자.... 하여튼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립을 촉구하는 노래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당시의 유행 했던 노래는 <대한혼> <소년모험맹진가> <그리스도 군병가> 등이있다. 초기 기독교는 철저히 항일적이었다. 하지만 3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친일적으로 바뀐다. 현대의 한국교회는 친일적 성향이 주도하고 있다.
1919년 이후 일본의 통치 방법에 유의해야 한다. 일제는 조선 사람들의 항거에 깜짝 놀라 더이상 강제적으로 하면 폭발하겠다 싶어 그들을 구슬리며 풀어주기 시작한다. 사실 이 때가 가장 무섭다. 이때부터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립, 허무주의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한쪽에서는 이제는 조금 자유롭다는 쾌락주의가,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 독립할 수 없다. 인생은 참 허무하다는 허무주의가 스며든다. 아마 당시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인지를 못했을 것이다.
삼일운동으로 무단정치는 문화정치로 변모하고, 일정 한도 내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허락한다. 이게 정말 무서운 마약이다. 일상적 감시 체계를 헌병 경찰에서 보통 경찰로 바꾼다. 1920년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이 시작된다. 참.. 이때 조선일보는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대변했는데 이제는 일본을 대변하는 신문이 되었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룰 것이다.
1920년? <희망가>
아직도 부르는 노래 중 하나는 희망가다. 필자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희망가가 아니라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절망가>이다. 사실 이때 기독교는 깊은 허무주의로 들어가면서 민족의 정신도 버리고, 삶의 개혁도 버리고 요한계시록에 매달린다. 종교에서 삶을 배재한 시기다. 가만희 들어보면 <사의 찬미>와 느낌이 너무 비슷하다. <희망가>대해 박찬호는 이렇게 말한다.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풍기다 이윽고 망국의 한과 실의, 비탄 속에 가라앉아버린 창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 인생의 비애를 저주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적으로 승화된 예술가곡으로 변하거나 혹은 상업 자본가에 의해 레코드가 만들어지면서 창작 신민요, 유행가로 변해갔다"
<희망가>의 흐름이 홀로 아리랑을 비롯한 아리랑의 곡조와 상당히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이 있는데 최근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일제시대의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제강점기 본조 아리랑>에서 참조 바람.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1920년 낙원창가
1925년 봉선화 /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봉선화>는 곡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가사가 붙여진 노래다. 1920년 바이올리니스트인 홍난파가 작곡을 하여 노래를 만든다. 곡을 만든지 5년이 지난 1925년 김형준이 시를 붙여 완성된다. 여름이 되면 골목이나 마당 한쪽에 봉선화가 피어난다. 흰색, 분홍색, 자주색 등 5가지 정도의 색을 가진 탓에 꽃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한다. 꽃이 지면 씨방이 생겨 건드리면 톡터지면서 멀리 퍼져 나간다. 이 모습이 일제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조선사람의 저항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 바람에
내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환생'은 곧 자주독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홍난파는 이렇게 독립을 꿈꾸며 자신의 모든 생을 민족정신을 고취 시키는데 사용했다. 조선민족의 망국의 슬픔과 해방을 꿈꾸는 <봉선하>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32년 콜럼비아 2월 신보에 <사공의 노래>와 함께 발매되고, 1936년 빅타레코드 3월 신보로 소프라노 박경희의 레코드판으로 발매된다. 홍난파에 생애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 대한제국 국민
1926년 사의 찬미 / 윤심덕
일제강점기 노래를 이야기하면서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선 정서는 <희망가> 전후로 이야기 했으니,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의 찬미>의 정서를 읽어야 한다. 단지 유부남과 처녀의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만 읽으면 안된다. 당시 조선은 꿈을 잃은 체 살아가야하는 암울한 시대적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이때 윤심덕과 김우진 러브스토리가 전개된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1927년 영화 <낙화유수>의 낙화유수
1928(1932년) 황성 옛터 / 이래리수
1929년 서울 마치 / 랑소희
1930년 종로 행진곡 / 복혜숙
1931년 라인강 / 이애리수
1931년 봄노래 / 채규엽
1931년 패수의 소양곡 / 강석연
1932년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 채규엽
1932년 삼천리강산 에라 좋구나 / 신카나리아
1932년 세기말의 노래 / 이경설
3기 1933년부터 1945년
이 부분은 40년 전과 후로 구분하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음악적 특징으로만 보면 함께 묶는 것이 좋을성 시팓. 왜냐하면 30년대 이후 대중음악은 대체로 혼란기를 지나 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40년 이후 친일가요와 군국가요가 판을 친다. 하지만 음악적 부분에서 그들의 음악은 30년대에 완성된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는 없다.
1933년 농촌의 석조 / 김선초
1933년 항구의 일야 /전옥
1933년 경선은 조흔 곳 / 이결설
1933년 타향살이 / 고복수
1933년 인생의 봄 / 왕수복
1933년 연밥 따는 아가씨 / 왕수복
1934년 이원애곡 / 고복수
1934 진달래의 애심곡 / 김선초
1934년 오! 내사랑 / 미스코리아
1934년 봉자의 노래 / 채규엽
1934년 영춘부 / 선우일선
1935년 목포의 눈물 / 이난영
1935년 사막의 한 / 고복수
1936년 마라손 제페가 / 채규엽
1936년 신농부가 / 강홍식
1937년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1937년 백만 원이 생긴다면 / 김정구.장세정
1937년 청춘부대 / 남인수.송달협,장세정.이난영
1937년 애수의 제물로 / 남인수
1937년 국경의 버듯밧 / 송달혐
1937년 요핑게 조핑게 / 이은파
1938년 국경열차 / 송달협
1938년 백두산 타령 /미스코리아
1938년 개고기 주사 / 김해송
1938년 청춘계급 / 김해송
1938년 한양은 천리원적 / 황금심
1938년 봄 사건 / 박향림.김해송
1938년 바다의 교향시 / 김정구
1938년 왕서방 연서 / 김정구
1938년 장모님 전상서 / 이규남
1938년 비 오는 청등가 / 이병한
1938년 앵화폭풍 / 김정구
1939년 대지의 항구 / 백년설
1939년 사막의 애상곡 / 진방남
1939년 만포선 천리길 / 황금심
1939년 애인부대 / 서봉희
1939년 일자일주 / 백년설
1939년 북방여로 / 백년설
1939년 북국 오천키로 / 채규엽
1939년 팔도 장타령 / 김해송
1939년 나무아미타불 / 김해송
1939년 감격시대 / 남인수
1939년 남행열차 / 이난영
1939년 연애 편의대 / 남인수 장세정
1940년 잘 있거라 단발령 / 장세정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1934)
부산 출신의 고복수는 아버지의 돈 육심원을 훔쳐 상경한다. 오케레코드와 천원에 계약을 맺고 1934년 2월 '부산태생 천재 성악가'라는 타이틀로 '타향'이 담긴 음반을 발표한다. 불과 한 달 만에 5만장이 팔려 나간다. 지금도 엄청난 판매량이지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성공이었다. 굳이 2020년 음반 판매량으로 환산한다면 거의 2천만 장은 되지 않을까. '타향'은 육이오 전쟁 당시 고복수의 생명을 구한 노래이기도하다. 전쟁때 인민군에 끌려 가다 평안도에서 국군을 만난다. 적으로 오해받고 사살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타향'를 부른 가수라는 것일 밝혀지면서 목숨을 구하게 된다.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1938)
필자의 기억에 아버님이 자주 부르셨던 곡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곡이 50년대 이후의 곡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노래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1930년대 두만강은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삼엄한 경계를 하던 곳이다.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까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가던 시기였기에 두만강은 중요한 경계초소가 있었다. 식민지의 설움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탓에 1936년 곡이 발표되자 일본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금지처분을 내린다. 그러다 한국전쟁 무렵에 갑자기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김정구는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로 인정받게 된다.
김정구가 부르는 눈물젖은 두만강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야(1938)
음악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공부해 안도 자부하는 나에게 박향림은 낯설다.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제목을 들었지만 박향림은 처음이다. 그만큼 멀고 먼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박향림은 당대의 걸출한 이난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했던 가수다.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OST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말 우울했던 시대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코믹함 그 자체다. 지금 들어도 우스운 노래가사와 멜로디다. 그런데 당시에 이런 풍의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호기심만 폭발한다.
김영춘 '홍도야 우지마라'(1939)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는 영화주제가로도 사용되어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다. 30년대 말 일제는 그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조선을 압박하고 태평양 전쟁을 확장해 간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홍도의 순정이 담겨 있다. 이것 또한 자국가인 조선을 사랑하는 의도에서 작사된 곡이다. 당시 억압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은유적으로 자신들의 심정을 발성한 것이다.
이것으로 1930년은 끝이 난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30년대는 40년대와 맞물려 있고, 정서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대충 마무리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