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고복수 1934년
작사 김능인
작곡 손목인
노래 고복수
발표 1934년
회사 콜럼비아레코드사
고복수 <타향살이> 해설
고복수의 <타향살이>의 원제는 <타향>이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무단으로 공격한다. 일 년 뒤인 1932년(또는 1934년) 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전조선명가수대회에서 23세의 고복수가 출연하여 3등으로 입상한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출전한 고복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감동을 주었다. 그 후 몇 달 뒤 청년으로 처음 작곡을 시작한 손목인의 <타향>을 취입한다. 이곡이 지금의 <타향살이>이다.
*발표 시기를 유차영은 <유행가가 품은 역사>에서 1932년으로 나오지만 나머지 자료들은 모두 1934년으로 소개한다. 필자로 1934년으로 적는다. 이 부분은 검증이 필요하다.
가사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가 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대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는 고향을 떠나 부평처럼 떠도는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다. 여기서 부평(浮萍)은 모내기를 끝낸 논에 보이는 작은 개구리밥으로 불리는 수초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가 벌써 십 년이다. 버드나무가 푸르른 봄이 찾아왔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다. 버들피리 꺾어 불더 그때를 그리워하는 망향(望鄕)의 한을 노래한다.
아마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닐 것이다. 일제에 의해 고향을 떠나 만주와 같은 먼 타국에서 서럽게 지내야 하는 조선인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일 것이다. 마지막 4절 가사는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이 영 없어진 탓일까?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이란 가사 안타깝게 들린다. 일제의 폭정이 최고치에 달하기 시작한 해가 1934년이다. 어느 누가 10년 후에 일제가 망하고 해방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고복수는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 용정 일대를 찾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고복수에게 30대의 부인이 찾아와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면 집주소를 주면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10여 년 전 부인은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남편은 병으로 죽고 어느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향으로 갈 수 자신의 신세를 고복수에게 전해 주었다. 고복수는 사연을 듣고 공연이 끝나면 함께 고향에 내려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 부인은 공연이 끝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아직도 일제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민족을 압제하고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고복수는 이 사정을 김능인에게 알렸다. 김능인은 여인의 마음을 담아 작사했고 작곡가인 손목인이 곡을 붙여 타향살이가 만들어져 졌다. 고복수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손목인을 깍듯이 대하고 언제나 존경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