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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6

<잘했군 잘했어> 하춘화와 고봉산 노래개요는 1971년에 하춘화와 고봉산이 함께 부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트로트 곡입니다. 이 곡은 사실 1965년에 먼저 신민요 형태로 고봉산과 송춘희가 발표했고, 이후 1968년에는 아리랑 시스터즈와 다시 불렀습니다. 하지만 하춘화와 고봉산이 함께한 버전이 가장 크게 히트하면서 대표적인 트로트 곡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34년 출시된 입니다. 김주호와 선우일성이 듀엣으로 부른 곡으로 전래민요를 노래로 만든 것이죠. 이후에 비슷한 노래와 약간 가사만 다른 노래들이 많습니다. 1962년 송춘희는 으로 제목을 바꾸게 되고, 많은 가수들이 동일한 제목을 음반을 취입합니다. 그러나 1971년 우리가 잘 아는 지금의 노래가 탄생하게 됩니다.   1971년 당시 하춘하는 만 18세였고, 고봉산.. 2024. 9. 29.
영산포 뱃길, 가사, 지화자 영산포 뱃길 작사 작곡 고봉산 노래 지화자 (월견초 사 / 김성근 곡?) 가사 목포항 찾어가는 영산포 뱃길 목이메인 물소리를 누가 듣느냐 잊자해도 그리운 님 다시 못 올 그 시절은 이 포구에 정만 두고 올 줄 모르네 빈 배만 오고가는 영산포 뱃길 임자 잃은 아낙네는 몇몇이드냐 닷줄 내린 포구가에 무슨 소리 구슬픈데 시름없이 돌아서는 발길을 잡네 2021. 5. 11.
다시 찾은 삼천포, 가사, 김상진 , 1972년 다시 찾은 삼천포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 노래 김상진 발표 1972년 회사 지구레코드사 이 곡은 고봉산 작곡집 에 들어가 있는 곡이다. 동일한 제목이지만 다른 곡인 신재일의 도 있다. 화자의 고향은 삼천포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삼천포에 살게 되면서 정이 들었다. 노산공원과 학섬은 삼천포에 자리한 유명한 곳이다. 삼천포 지금에 경남에서 유명한 남일대 해수욕장이 있다. 가사 배로와도 삼천포여 차로 와도 삼천폰데 삼천 날짜 긴긴 날을 너하나만 생각했다 노산 공원 달빛 아래 첫사랑 주고 받던 노을 빗긴 학섬에서 조개줍던 그 시절이 그리웁고 보고파서 다시 찾은 삼천포 인심좋은 삼천포요 살기좋은 삼천포요 내 고향 아니지만 너무나도 정들었다 노산공원 벤치에서 첫사랑을 맹세하고 황혼빗긴 등대에서 굴을 따던 .. 2021. 5. 11.
유달산아 말해다오, 가사, 이미자, 1967년 이미자 유달산아 말해다오 작사 반야월 작곡 고봉산 노래 이미자 발표 1969년 회사 지구레코드사 이미자의 '유달산아 말해다오'는 고봉산 작곡집 제7집에 수록된 곡이다. 이곳에는 남진의 목포의 연가와 이미자의 또 다른 노래 목포의 달밤이 들어있다. 고봉산(1927-1990)은 남석일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본명은 김민우다. 1927년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금성좌 전속 단원으로 데뷔했다. 1961년 김진경 작사 김민우 작곡 '아메리카 마도로스'가 대 히트를 치면서 알려졌다. 1990년 6월 21일 지병으로 앓아 왔던 심장병으로 운명을 달리한다. 가사 꽃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던 처녀야 달 뜨는 영산강에 노래하던 총각아 그리움을 못 잊어서 천 리 길을 왔건만 임들은 어디 갔나 다 어딜 갔나 유달산아 말해다오 말 .. 2021. 5. 11.
고봉산작곡 제7집 고봉산작곡 제7집 SIDE 1 1. 유달산아 말해다오(이미자) 2. 목포의 달밤(이미자) 3. 오동 추야(이미자) 4. 비젖는 나그네(이미자) 5. 첫사랑 편지(문주란) SIDE 2 1. 목포의 연가(남진) 2. 여길가도 저길가도(남진) 3. 생각을 말아야지(남진) 4. 사이공 부두(임선애) 5. 늴리리 튀스트(이은관) 이미자가 부르는 이미자가 부르는 이미자의 이미자의 2021. 5. 10.
영산포 아가씨, 이미자, 1969 영산포 아가씨 작사 반야월 작곡 고봉산 노래 이미자 발표 1965/1969 영산포는 현재의 나주시를 말한다.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마골의 용소에서 발원하여 광주시와 나주를 거쳐 목포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주만을 영산포로 부른다. 영산포는 수운이 적당했다. 상류로는 배가 운행하기 힘들었기에 영산포까지가 배들이 운행하기 적합했다. 목포가 개항하면서 동력선이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드나들면서 영산포를 호황을 이루었다. 육지 도로가 썩 좋지 않았던 시절 배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덕분에 영산포는 목포와 내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구의 기능은 1960년대로 막을 내린다. 철도와 도로가 점점 발달하면서 포구의 기능이 상실한 탓도 있지만 상류로부터 밀려오는 토..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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