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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월10

불효자는 웁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작사 김영일 작곡 이재호 노래 진방남 발표 1940년 8월 곡해설 반야월로 유명한 이전 예명은 진방남이었다. 오래가지 않았지만 한 때 가수로 활동했다. 진방남(반야월)은 서울의 태평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쉽게 찾아 뵙지 못했다.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아들이 먼 길을 떠난다고 하자 한 걸음에 달려 왔다고 한다. 당시 진방남은 일본으로 취입을 위해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 일후 진방남의 어머니는 '불효자는 웁니다' 취입 두 시간을 앞다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진방남은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녹음실에 들어가 흐느껴 울어 녹음을 몇번을 반복해야 했다. 그야말로 노래제목이 자신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사 불러봐도 울어봐도 .. 일정강점기가요 2021. 6. 18.

구룡포 사랑, 조미미, 1965년

구룡포 사랑 작사 반야월 작곡 박시춘 노래 조미미 발표 1965년 회사 조미미 구룡포 사랑 가사 동해바다 굽돌이 길 임을 실은 통통선 거울 같은 초록물에 해가 지는데 부산 가신 우리 임 왜 안 오시나 동래 울산 큰애기와 정분이 났나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기다리는 구룡포의 아가씨 -간주중 구룡포에 달이 뜰 때 눈물 맺은 첫사랑 백사장의 해당화도 곱게 피는데 오신다던 그 날짜를 잊으셨나요 통통선의 고동소리 울릴 적마다 등댓불을 바라보고 가슴 조여 애태우는 구룡포의 아가씨 노래 해설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 조미미는 이미자와 더불어 한국 최고의 사랑을 받은 여가수였다. 놀랍게도 이미자도 68년에 를 불렀다. 아마도 60년대 중후반은 포항이나 구룡포가 뜨는 시절이 아니었는가 싶다. 포항 사람이 아니니 당.. 60년대가요 2021. 6. 13.

포항은 내 고향, 손인호, 1964

포항은 내 고향 작사 반야월 작곡 손목인 노래 손인호 발표 1964 회사 신세기레코드사 가사 1. 포항만 푸른 물에 갈매기 노래 흰 돛대 남실남실 님 소식인가 송도라 해수욕장 흰 모래 위에 새빨간 포도주로 맺은 첫사랑 포항은 아름다운 내 고향 항구 2. 중립산 허리 위에 꽃 구름 피고 남풍이 불어불어 큰고기 난다 모래가 숨 쉬는 동해라 바다 어부들 북소리가 흥겨웁구나 포항은 산수 좋은 내 고향 항구 손인호 포항은 내고향 이노래는 포항이 포도주를 알리기 위해 64경에 만든 노래이다. 6인치 음반으로 만들어졌다. 자료를 찾다 하도 신기해서 '포항 포도주'로 검색을 하니 기가찰 기사들이 쏟어진다. 실제로 포항에 포도주 공장이 있었다. 포항포도주와 독림양조에서 만들 술이 66년 11월에 적발돼 폐기 처분했다는 .. 60년대가요 2021. 6. 13.

꽃마차, 진방남, 19442년

꽃마차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노래 진방남(반야월의 다른 이름, 반야월의 본명은 박창오) 발표 1942년 이 노래는 원래 서울을 노래한 곡이 아니라 1939년 하얼빈을 노래한 곡이다. 슬프게도 당시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공할 때로 상당한 경쾌한 분위기를 가졌다. 일본 군국주의적 성향을 다분한 노래다. 해방후 친일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가사를 바꾸었다. 원곡에는 서울이 하루삔으로 되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친일가를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적절하게 섞은 것이다. 다행히 2010년 6월 간단회 자리에서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과했다. 그의 나이 93세 때다. 가사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한들한들 손풍금 소리 들려온다 방울.. 일정강점기가요 2021. 5. 23.

영산포 아가씨, 이미자, 1969

영산포 아가씨 작사 반야월 작곡 고봉산 노래 이미자 발표 1965/1969 영산포는 현재의 나주시를 말한다.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마골의 용소에서 발원하여 광주시와 나주를 거쳐 목포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주만을 영산포로 부른다. 영산포는 수운이 적당했다. 상류로는 배가 운행하기 힘들었기에 영산포까지가 배들이 운행하기 적합했다. 목포가 개항하면서 동력선이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드나들면서 영산포를 호황을 이루었다. 육지 도로가 썩 좋지 않았던 시절 배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덕분에 영산포는 목포와 내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구의 기능은 1960년대로 막을 내린다. 철도와 도로가 점점 발달하면서 포구의 기능이 상실한 탓도 있지만 상류로부터 밀려오는 토.. 60년대가요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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